
1. 서론: 화폐 신뢰의 붕괴와 코드의 등장
화폐는 언제나 ‘신뢰(trust)’의 매개였다.
인류의 경제사는 신뢰의 형태가 변화한 역사이기도 하다.
금본위제 시대의 신뢰는 물질적 희소성에 기반했고, 근대 금융은 국가와 은행이라는 제도적 장치 위에 구축되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법정화폐는 무제한 발행과 통화 팽창을 통해 그 신뢰의 토대를 점점 약화시켜 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 구조적 불신의 폭발이었다.
당시 발행된 한 익명 논문 ―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 은
‘중앙 없는 신뢰(Trustless Trust)’를 제시함으로써 경제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점을 열었다.
비트코인은 새로운 화폐가 아니라, 신뢰를 수학으로 증명하려는 실험이었다.
2. 신뢰의 수학화: 블록체인의 합의 알고리즘
블록체인의 핵심은 데이터의 불변성(immutability)이 아니라 참여자 간의 합의를 자동화하는 구조다.
이 합의는 Proof-of-Work(PoW), Proof-of-Stake(PoS) 등 경제적 인센티브를 내포한 알고리즘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통적 금융 시스템에서는 신뢰의 판단이 제도에 귀속된다.
반면 블록체인은 ‘신뢰의 판단’을 코드가 대신 수행한다.
각 노드는 동일한 거래 내역을 공유하며, 수학적 계산을 통해 ‘거짓 없는 장부’를 유지한다.
따라서 신뢰의 근거는 인간의 도덕이 아닌, 확률적 합의(probabilistic consensus) 로 대체된다.
이전까지의 신뢰 구조가 “중앙의 권위에 기반한 확정적 신뢰” 였다면, 블록체인의 신뢰는 “분산된 참여자 간의 통계적 신뢰” 이다.
즉, 확실성(certainty) 대신, 충분한 확률(sufficient probability)을 선택한 것이다.
3. 화폐의 세 번째 진화: 금 → 제도 → 코드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비트코인은 희소성(scarcity)의 개념을 물리적 자원에서 계산 자원으로 이동시켰다.
채굴(mining)은 단순한 공급 조절이 아니라, 디지털 세계에서의 희소성 구현이다.
이는 ‘노동 가치’의 개념이 현실의 노동에서 연산 자원(computational resource)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화폐의 발행 주체가 사라짐으로써 중앙은행이 담당하던 ‘통화정책(monetary policy)’이 알고리즘화(algorithmization)되었다.
발행량, 인플레이션 조정, 보상 구조가 사람이 아닌 코드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통화정책이 정책이 아닌 규칙(rule) 이 되는 전환점이다.
4. 인간의 신뢰와 알고리즘의 윤리
비트코인의 구조는 이론적으로 완결되어 보이지만, 사회적 신뢰의 복잡성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합의 알고리즘은 부패를 방지하지만, 책임(responsibility)을 생성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뢰의 수학화”는 신뢰의 종말이 아니라, 신뢰의 재배치(reallocation)이다.
신뢰의 대상이 국가에서 코드로 이동했을 뿐, 그 코드의 설계자와 운영자에게 여전히 윤리적 책임이 남는다.
이는 향후 ‘스테이블코인’과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논의로 이어지는 핵심 문제의식이 된다.
즉, “신뢰를 완전히 분산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기술적 문제를 넘어 정치경제적 구조의 문제로 확장된다.
5. 결론: 신뢰의 탈중앙화와 그 한계
비트코인은 기존 화폐 시스템의 대안이 아니라, 신뢰의 구조를 실험하는 모델이다.
중앙화된 신뢰가 부패의 위험을 가진다면, 분산된 신뢰는 무책임의 위험을 가진다.
따라서 탈중앙화의 본질은 ‘중앙의 부정’이 아니라, 중앙과 분산의 균형적 재구성에 있다.
결국 화폐의 진화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신뢰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다.
블록체인은 그 질문을 강제로 꺼내놓은 거대한 실험장이다.
금은 물리적 신뢰였고, 법정화폐는 제도적 신뢰였다.
그리고 코인은 이제, 수학적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