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전세 시스템의 착시와 붕괴
전세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합리적인 주거 대안’처럼 소비되어 왔다.
목돈을 맡기고 일정 기간 거주한 뒤 원금을 돌려받는 구조는 겉으로 보면 리스크 없는 저축처럼 보이지만, 실제 구조를 들여다보면 전세는 주거 제도가 아니라 고위험 레버리지 금융 구조에 더 가깝다.
최근 몇 년 사이 반복된 전세 사기, 보증금 미반환 사태는 우연이 아니라 이 구조의 필연적인 균열에 가깝다.
🏠 전세는 저축이 아니라, 고액 무담보 대출이다
전세는 임차인이 집주인에게 무이자로 거액을 빌려주는 구조다.
겉으로는 보증금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담보 회수가 불완전한 대출에 가깝다.
예를 들어,
매매가 5억 원짜리 아파트에 전세 3억 5천만 원이 설정되어 있는 경우,
임차인은 집주인에게 시중은행 기준으로 보면 약 연 3~5% 금리의 무담보 대출을 제공하는 셈이다.
3억 5천만 원에
연 4% 금리를 적용하면
연간 기회비용은 약 1,400만 원,
월 기준으로는 약 116만 원 수준이다.
이 비용을 임차인이 대신 부담하면서 “월세를 안 내는 구조”가 바로 전세다.
문제는 이 구조가 오직 한 가지 가정 위에서만 유지된다는 점이다.
바로 “집값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집값이 유지되거나 상승하는 동안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집주인은 집을 팔아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집값이 10~20%만 하락해도, 이 구조는 즉시 위험 수위로 진입한다.
🏚️ 숫자로 보면 드러나는 ‘역전세 폭탄’ 구조
실제 예시를 보자.
2021년 수도권 외곽 신축 빌라
매매가: 2억 원
전세가: 1억 8천만 원
2024년 시장 침체 이후
해당 주택 실거래가: 약 1억 4천만 원
이 상황에서 집을 팔아도
임차인에게 돌려줄 전세금 1억 8천만 원을 충당할 수 없다.
부족분 4천만 원이 발생한다.
이게 바로 최근 몇 년 간 수만 건 발생한
‘역전세 + 깡통전세’ 구조다.
문제는 이 구조가 특정 사기꾼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전체가 비슷한 레버리지 구조 위에 올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2020~2022년 사이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는
전세가율 90% 이상인 주택 거래가 일반화되었고,
이 중 상당수가 빌라·오피스텔 등 감가속도가 빠른 자산이었다.
즉, 붕괴는 예정된 구조였다는 뜻이다.
🏗️ 전세는 “개별 계약”이 아니라 “연쇄 구조”다
전세의 가장 근본적인 위험 요소는 개별 계약이 아니라 연쇄 구조라는 점이다.
하나의 집주인이
A 주택 → 전세 2억
B 주택 → 전세 2억
C 주택 → 전세 2억
이렇게 총 6억 원의 전세금을 받아 레버리지를 만들고, 다시 추가 주택을 매입하는 구조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구조가
부동산 가격 상승기에선 정상 작동하지만 하락기로 진입하면 연쇄적으로 붕괴된다는 점이다.
가격이 멈추는 순간
→ 신규 전세 수요 감소
→ 보증금 회수 지연
→ 자금 흐름 정지
→ 보증금 반환 불능
이 흐름은 개별 악인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 붕괴 공식에 가깝다.
💸 금리의 변화가 전세 구조를 파괴했다
전세 구조를 지탱하던 또 하나의 전제는 저금리 환경이었다.
2020년 기준
기준금리: 0.5%
2023년 이후
기준금리: 3.5% 이상
이 변화는 전세 시스템 전체에 결정적인 타격을 줬다.
과거에는 전세 3억 원을 받아 대출 이자를 갚거나 추가 투자에 활용할 수 있었지만,
고금리 환경에서는 전세금으로도 이자 감당이 어려워진 구조가 되어버렸다.
동시에 임차인의 입장에서는 전세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워졌고, 전세 대신 월세로 전환하는 비율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2024년 기준
서울 월세 거래 비중은 전체 임대차 거래의 약 55% 이상(추정치)까지 상승했다.
이건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전세 시스템 자체가 구조적으로 해체되고 있다는 신호다.
🧭 지금 벌어지는 건 ‘가격 조정’이 아니라 ‘모델 붕괴’다
이 사태를 단순히 전세 사기 문제로만 보면 안 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건,
한국식 주거 금융 모델 자체의 붕괴다.
전세는
집값 상승 → 신뢰 → 재투자
라는 구조 위에서 돌아갔지만,
이제는 그 선순환이 끊어졌다.
그리고 이 붕괴는
청년 주거 불안정, 주거비 부담 증가, 계층 이동 경로 차단으로 이어진다.
전세가 사라지는 건
단순히 임대차 방식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내 집 마련 이전 단계”라는 통로가 무너지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변화가 청년 세대, 무주택 계층, 지역 간 격차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좀 더 구조적으로 다룰 예정이다.